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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dummy/Wisdom

락앤락 비지니스 스토리

김준일 락앤락 회장


물통·수납함·냄비로 제2성장기 맞아… 차별화된 밀폐용기로 급성장
'세계 주방생활용품의 황제가 되겠다'


락앤락 하면 플라스틱 밀폐용기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락앤락에서는 물통·수납함·냄비도 만든다. 기존의 밀폐용기가 아닌 제품의 매출 비중이 70%에 가깝다. 김준일 락앤락 회장은 주방생활용품으로 제2의 성장기를 열었다.

 

2월 23일 낮 서울 여의도의 한 중식당에서 주방생활용품업체 락앤락의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준일(59) 락앤락 회장이 “2020년 매출 10조원을 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한 기자가 질문했다.
“락앤락은 차별화된 밀폐용기로 성장했습니다. 근래 선보인 냄비·프라이팬 등은 특별함이 없어 보입니다. 말씀하신 목표를 달성하려면 연평균 매출이 30~40%씩 늘어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김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이미 락앤락 매출의 70% 가까이를 기존 밀폐용기와는 다른 주방생활용품에서 올립니다.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는 락앤락이 주방생활용품업체로 알려졌어요. 락앤락의 새로운 주방생활용품도 경쟁력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락앤락은 김 회장이 맨손으로 일군 회사다. 플라스틱 밀폐·저장용기에서 출발해 도자기·유리 밀폐용기로 범위를 넓혔다. 락앤락은 지난해 전년 대비 38.6% 증가한 388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해외 진출 확대와 제품 종류를 다양화한 게 주효했다. 국내 플라스틱 밀폐용기 시장의 약 60%를 점유하는 1위 기업인 락앤락은 높은 브랜드 인지도를 바탕으로 다양한 주방생활용품을 출시하며 제2의 성장기를 맞았다.

김 회장은 27세 때 유통사업을 시작했다. 20대 후반 그의 머릿속은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사느냐’는 고민으로 가득 찼다. 1978년 어느 날 신문에서 ‘수입자유화’라는 단어를 봤다. 수입자유화대책위원회 발족 기사였다. 그는 곧 열릴 수입자유화 시대에 맞춰 수입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돈이 필요했다. “역사를 좋아해서 역사학자가 되어볼까도 했는데 생각을 접었어요. 돈이 있어야 살겠다 싶어 사업을 시작했죠. 5년 동안 벌어서 다른 일을 해야지 했는데 32년이 지났네요.”
김 회장은 경북 대구 부호의 3남 4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광산 운영, 유통업을 비롯해 아버지의 사업이 줄줄이 실패했다. 담보로 묶어뒀던 집이 넘어갔다. “중학교 입학 전부터 이사를 여러 번 했죠. 이삿짐을 나르는 소달구지가 50개, 40개로 점점 줄었어요. 어릴 때는 꿈이 그저 맛있는 것 먹고 잘사는 거였어요.”

1978년 설립한 국진유통은 그의 소망을 이룰 발판이었다. 처음에는 한 업체에서 수입한 물건을 받아 백화점과 남대문에 파는 중간상인으로 출발했다. 이후 직접 제조업체와 접촉해 세계 주방용품업체 200여 곳의 국내 유통을 독점했다. 당시 한국산 주방용품은 고무대야와 양은냄비, 플라스틱 바가지 정도에 불과했다. 

김 회장이 들여온 유리·도자기·알루미늄·플라스틱 등 다양한 재질의 주방제품이 시장을 휩쓸었다. 국진유통은 주방수입용품업체 1위가 됐다. 자신감이 생긴 김 회장은 1985년 락앤락의 전신인 국진화공을 설립하고 자체 생산을 시작했다.

제조업은 쉽지 않았다. 국진화공 초기 3년 동안 문제가 겹쳤다. 임금 인상과 스위스 프랑화와 엔화 가치 급등이 위기를 가져왔다. 노동운동이 한창이던 때 임금을 올려주지 않으면 일을 안 하겠다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1985년부터 3년 동안 임금을 2배로 올렸다. 생산성을 그만큼 올리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공장설비 자금을 스위스 프랑화로 빌렸는데 1985년부터 스위스 프랑화 가치가 급등했다. 엔화 가치도 올라 일본에서 수입하던 원재료 비용이 크게 늘었다. 3년 동안 엄청난 적자가 났다. 김 회장은 견디다 못해 지분 일부를 지인에게 팔고 회사를 떠나기까지 했다.


중국에서 인기가 높은 락앤락 차통.

1988년부터 유통업으로 자금을 모아 1992년 국진화공을 다시 인수했다. 회사 이름을 하나코비로 바꿨다.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동집약적인 부분은 아웃소싱하고, 영업과 마케팅, 연구개발(R&D)에 집중하기로 했다. 보유하던 기계를 다른 생산업체에 넘기고 기술을 가르치며 생산 아웃소싱 계약을 했다.

이후 노동집약적이지 않고 자동화된 기계설비로 제품이 만들어지는 플라스틱에 눈을 돌렸다. 초기 사업은 순조로웠다. 도시락통·피크닉통·욕실제품 등 내놓는 제품마다 큰 인기를 끌었다.

기쁨도 잠시였다. 제품별 라이프사이클이 채 2년이 안 됐다. 한 제품이 잘 안 팔리면 다른 디자인의 제품을 내놓아야 했다. 투자비는 증가하고 재고가 늘었다. 악순환이었다. 원인은 유사한 상품 출시였다. 하나코비가 제품을 내놓으면 몇 달 뒤 다른 업체에서 비슷한 상품을 내놓아50~60% 싼 가격에 팔았다. 그러면 하나코비 제품은 점점 팔리지 않았다. 김 회장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 고민했다.

“답은 ‘브랜드’라고 생각했습니다. 식당과 똑같은 이치였어요. 입소문 난 전문식당은 손님이 많잖아요. 식단이 단순해 같은 재료를 많이 쓰면 원재료 조달 비용도 낮아지고요.”

10억원 투자한 락앤락 사장될 뻔
김 회장은 1996년 초 소비자가 기억할 브랜드 제품을 만들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템에 집중할지 결정하기 전에 ‘해서는 안 될 품목’을 종이에 죽 적어나갔다. 계절에 따라 수요 편차가 큰 제품, 문화적 차이가 심한 제품, 배송 중 파손되기 쉬운 제품 등 20여 개 목록이 뽑혔다. 목록을 보며 버려야 할 제품을 하나씩 지우고 나니 딱 한 개가 남았다. 락앤락의 전환점을 마련한 ‘밀폐용기’였다.
바로 시장조사를 시작했다. 곧 R&D와 제품 제작에 들어갔다. 공장장이 결점을 보완한 제품을 들고 매일 김 회장 자택 근처로 찾아왔다. “공장장을 집 근처 공원에서 만났어요. 하루 종일 공장에서 서서 일을 한 그에게서 발 냄새가 엄청 났거든요.”


미국에서 먼저 출시한 샐러드용 밀폐용기. 야채와 소스를 분리해 담을 수 있다.
집에 들어와서는 용기 뚜껑을 닫았다 열었다를 반복했다. “밤 12시까지 그러고 있으면 집사람이 잠 좀 자자며 엄청 불평을 했습니다.” 1년 후인 1998년 그는 ‘전혀 새지 않는’ 밀폐용기를 만들었다. 제품 이름은 ‘락앤락(Lock and Lock)’으로 정했다. ‘두 번 잠근다’는 뜻이다.
1999년 제품을 시장에 내놨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시장 반응이 썰렁했다. 할인점과 도매상은 이름 없는 신제품을 받아주지 않았다. 어렵게 할인점에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소비자가 거들떠보지 않았다. 10억원의 R&D 비용을 들여 만든 제품이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

김 회장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려고 매장에 갔다.
“소비자들이 새로운 스타일의 밀폐용기인 락앤락을 신기해하며 들었다가, 그대로 두고 다른 제품을 사갔어요. 관심은 있지만 구매할 정도는 아니었단 얘기죠. 제품의 진가를 설명하지 않고는 그 벽을 넘지 못하겠더군요.”
그는 할인점에 제품을 설명할 판매사원을 배치했다. 그달 매출이 전달보다 10배 올랐다.

그는 돈을 안 들이고 제품을 설명할 방법으로 홈쇼핑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국내 홈쇼핑업체들은 락앤락을 냉대했다. 그는 락앤락을 들고 미국으로 날아갔다. 미국의 실력 있는 작가·배우·제작진이 참여한 ‘인포모셜(information+commercial, 정보+광고)’을 만들어 미국과 캐나다 홈쇼핑업체를 찾아다녔다.

한 캐나다 바이어가 세계 최대 홈쇼핑 채널인 QVC의 캐나다 채널에 제품을 소개하자고 제안했다. 첫 방송에서 진행자가 락앤락 속에 지폐를 넣고 물속에 한참 넣었다 꺼내 뚜껑을 열었다. 지폐에는 물 한 방울 묻은 흔적이 없었다. 소비자들이 줄줄이 주문전화를 했다. 준비한 5000세트가 순식간에 팔렸다. 2001년 6월의 일이다.

이 같은 캐나다 방송 성공은 미국 QVC 진출로 이어졌다. 미국에서도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캐나다와 미국에서의 성공 스토리가 알려지면서 락앤락을 외면했던 국내 홈쇼핑업체들이 먼저 방송을 제안했다. 락앤락은 한국 홈쇼핑 채널에 진출해 분당 1000만원 매출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물통·수납함·냄비로 제2성장기 맞아… 차별화된 밀폐용기로 급성장
'세계 주방생활용품의 황제가 되겠다'

지난해 김준일 회장은 인도 기자들을 한국에 초청해 직접 제품 설명을 했다.

2003년 105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잘나가던 때 김 회장은 다른 생각을 했다. 한국 밀폐용기 시장 규모는 연간 800억원 정도라고 알려졌다. 그런데 한 해 동안 락앤락 매출이 그 시장 규모를 넘어섰다. 김 회장은 ‘일시적인 돌풍의 과수요’라고 보고 대처 방법을 다시 고민했다.

리서치 결과를 바탕으로 전략을 짰다. 리서치업체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락앤락 용기를 한 가정당 평균 44개 가졌다는 결과를 얻었다. 외국의 경우는 한 가정당 평균 24개였다. 그는 국내 매출 감소를 예견하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로 했다. 2003년 중국 웨이하이(威海)에 수출 전략기지로 삼을 공장을 지었다.

동남아에선 락앤락 물통이 인기
락앤락은 현재 110개국에 제품을 수출한다. 해외 21개 현지 영업·생산법인을 통한 해외 매출 비중이 약 70%다. 특히 중국 시장 매출 기여도가 높다. 지난해 매출에서 중국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40%다. 중국 매출은 진출 첫해인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139%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중국 진출 초기에 임차료가 비싼 상하이 한복판에 매장을 냈다. 일부러 비용을 많이 들인 이유가 뭘까? 김 회장은 고급 브랜드에 약한 중국인의 특성에 맞는 전략이었다고 설명했다. 시장에 갔다가 이 특성을 파악했다.
“현지법인을 열려고 금고를 사러 갔어요. 엄청 큰 금고는 600위안인데, 그 제품의 4분의 1 정도 크기 금고가 두 배 이상 비쌌죠. 작은 게 왜 이리 비싸냐고 물으니 점원은 ‘그건 상하이의 유명 브랜드 제품’이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어요.”

그는 중국에 공장이 있었지만 2004년부터 4년 동안은 관세와 운임을 내면서 한국에서 만든 제품을 수입해 팔았다. 당시 ‘메이드 인 차이나’는 싸구려, ‘메이드 인 코리아’는 고급 제품이란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4년 동안 브랜드 충성도를 높인 후 중국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베이징올림픽 이후 자국 생산 제품의 자부심이 높아진 점을 감안했다.

해외 진출에 박차를 가하며 김 회장은 저장용기 소재와 용도를 다양화하고, 아웃도어·리빙용품으로 제품군을 확대했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2008년 말에 냄비 브랜드 ‘쿡플러스’를 선보였다. 그는 지난해 세계 주방생활용품업계 황제가 꿈이라며 30년쯤 후에는 이 꿈을 이루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1978년 외국 주방용기를 수입해 팔던 락앤락은 미국 타파웨어·러버메이드에 이어 세계 플라스틱 밀폐용기에서 시장의 9.4%를 차지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아직 주방생활용품 전반을 다루는 글로벌 기업은 없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업체들이 분야를 넓히는 중이다. 김 회장은 이 업체들 사이에서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태국과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에서는 락앤락 물통이 인기다. 연중 기온이 높은 환경에 영향을 받았다. 천 소재 수납함은 한국과 중국에서 홈쇼핑을 통해 판매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김 회장은 밀폐용기에 집중하면서도 꾸준히 주방생활용품 개발에도 투자했다. 2008년 10월 스테인리스 냄비, 2008년 12월 천으로 만든 수납함, 2009년 9월 음식물쓰레기통, 지난해 9월 머그컵 등을 개발했다. 모든 제품의 판매량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김 회장은 멈추지 않는다.

제품 개발과 판매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느냐는 질문에 그는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고 답했다. 그는 수시로 락앤락 매장에 들러 소비자들이 어떤 제품을 사고, 어떤 제품 앞에서 머뭇거리는지 살핀다. 소비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적당한 제품 종류, 진열 방식, 제품 설명, 가격을 고민한다. 2월 25일에도 그는 중국 출장을 가기 전 오후 1시쯤 락앤락 본사 직영매장에 잠깐 들렀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매장을 찾은 직장인들의 모습을 살피고 빠르게 사라졌다.

매장에 간다고 누구나 아이디어가 솟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남다른 창의성이 있는 듯했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자질이 아닐까 싶었다. 부유한 사업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았다고 한다. 1950년대 BMW 오토바이를 탔던 그는 제1회 전국 오토바이 대회를 열고 직접 출전하기까지 했다. 제작에도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는 전문 지식이 없으면서도 새로운 것을 보면 ‘내가 저걸 만들어봐야겠다’ 하고 직접 만들곤 했어요.”
물론 소비자 의견이 제품 개발에 힘이 될 때가 많다. 냉장고용 수납용기인 멀티락이 대표적인 예다. 주부 곽선명 씨는 락앤락에 확실히 밀폐되는 냉동실용 보관용기 생산을 요청했다. 고무 파킹이 헐렁한 용기를 썼더니 냉동실에 성에가 끼었다고 했다. 락앤락은 2008년 7월 깔끔하게 냉동실을 정리하면서도 냉동 보관 중 용기가 파열되지 않고 밀폐력을 유지하는 냉동실 전용 밀폐용기 ‘멀티락’을 출시했다.

해외에서는 현지 소비자들의 특성을 반영한다. 중국에서는 차를 넣어 마시기 편리한 물통을 출시했다. 차를 걸러내는 망을 뚜껑 아랫부분에 뒀다. 차 물통은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미국에서는 현지 바이어의 요청을 받고 소풍용 샐러드 통을 개발했다. 여러 야채를 분리해 담고 소스도 따로 담을 수 있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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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호 하나코비 사장

2001년 밀폐용기 ‘락앤락’의 인기몰이가 시작됐을 때 우리나라 대다수 주부들은 하나코비를 외국기업으로 생각했다. 락앤락이 국내 밀폐용기 시장을 석권하고 세계 54개국으로 수출되고 있는 지금 외국 주부들은 하나코비를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생각한다. 성공신화의 뒤에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경구가 자리한다. 접시, 컵 등 600여가지의 주방용품을 만들던 중소기업에서 밀폐용기 전문기업으로 변신하면서 알짜배기 회사로 거듭났다. 그 덕에 2000년 99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2001년 176억원,2002년 490억원으로 뛰었고 지난해에는 1180억원 매출에 210억원의 순익을 올렸다. 락앤락은 LG홈쇼핑에서 3년 연속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로 뽑혔고, 지난해에는 세계 최대 홈쇼핑 QVC(미국)에서 하루 7만세트 판매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이달 초에는 중국 웨이하이웨이 공장(연산 5000만달러)에서 세계 각국으로 수출을 시작했다.

김창호(金昶浩•43) 하나코비㈜ 사장은 주위사람들로부터 애국자란 소리를 자주 듣는다.‘타파웨어’ ‘러버메이드’ 등 오랫동안 우리나라 가정의 냉장고를 점령했던 외국산 밀폐용기를 몰아내고,‘락앤락’으로 국산의 저력을 보여준 데 대한 애정 어린 찬사다.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포기해야 했던 가난한 대구 소년이 세계시장을 호령하는 강소(强小)기업의 최고경영자가 되기까지 30년 여정을 들어봤다.

▲ 두번 잠근다는 뜻의 ‘락앤락’으로 국내 밀폐용기 시장의 75%를 석권한 데 이어 세계 50개국에 수출하고 있는 하나코비 김창호 사장이 유럽시장 개척 계획을 밝히고 있다. 
하나코비 제공 

●중학교 중퇴 소년,27세에 사장 되다

-“학교 그만두고 돈 벌겠심더.”

1975년 5월 나는 어머니와 여섯 동생을 부여안고 한없이 울고 있었다. 열다섯 나이 중학교 2학년. 목수일을 하던 아버지는 친구와 벌인 사업이 잘못돼 술로 화를 삭이다 7년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파출부와 과일장사로 근근이 생계를 꾸렸지만 더 이상 배움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난은 어머니뿐 아니라 2남5녀의 맏이인 나의 멍에이기도 했다. 학교를 나와 가구공장 목수, 공사장 막노동꾼, 페인트공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독학으로 중졸•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80년 꿈에 그리던 대학(성균관대 건축공학과) 문턱을 밟을 수 있었다. 합격을 확인한 그날은 75년 5월의 그날처럼 온 집안이 눈물바다가 됐다. 어렵게 되찾은 배움의 길이었지만 젊은 시절의 혈기는 당시의 군부독재를 외면할 수 없었다.82년(3학년) 나는 군 입대와 퇴학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됐다.

-“복학하기 전 잠깐만 우리 매장에서 일좀 하지.”85년 제대 직후 당시 국진화공이란 회사를 차려 접시, 공기 등 멜라민 주방용품을 만들던 친척 형이 찾아왔다. 지금 우리 회사 회장인 김준일. 수많은 주방용품의 재고관리를 하면서 기대 밖의 흥미를 느꼈다. 형은 계속 일을 맡아 줄 것을 청했지만 당시 내 관심은 오로지 대학원에 들어가 ‘안전하고 값싼 건물’을 연구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대학원 생활은 오래 못갔다. 하고 싶은 연구를 하지 못하고 교수들 뒷바라지나 해주어야 하는 숨막히는 분위기.88년 가을 미련없이 대학원을 떠났다.

-다시 찾은 국진화공. 영업권 인수방식으로 남대문 직매장을 사들여 나만의 장사를 시작했다. 상호는 ‘남문상사’였고 나는 사장이었다. 하지만 기술과 자금이 달렸던 국진화공은 얼마후 경영난을 겪었고 나는 김준일 사장의 요청으로 국진화공의 기술담당 이사로 들어갔다. 공장을 다시 짓고 찬합, 접시, 숟가락, 젓가락, 욕실용품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어 도매상과 슈퍼마켓에 내다 팔았다. 우리 상품은 어디서건 인기가 좋았다. 다른 제품보다 가격이 훨씬 비쌌지만 ‘산리브’‘브라운스톤’‘치키버니’‘컬러즈’ 등 우리 브랜드는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탄력을 받은 국진화공은 93년부터 다양한 해외전시회 참가를 통해 수출판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회사이름을 바꾼 것은 이때.1등이 되자는 뜻의 ‘하나’에 ‘협력’을 뜻하는 ‘코-비즈니스’(Co-business)의 머리글자를 붙였다. 한글받침이 없고 단모음으로 구성돼 발음이 쉽고 영문표기(Hanacobi)도 간단했다.

-하지만 95년이 되자 하나코비의 에너지는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잘한 상품만 600여가지를 만들다 보니 매출이 연간 100억원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93년부터 미국, 독일, 홍콩 등지에 열심히 수출을 했지만 매출은 연간 100만달러도 안 됐다. 제품종류가 많다 보니 재고관리도 안 됐다. 잉크종류가 1000가지가 넘었고 제품 스티커는 1만 4000가지에 달했다.

●200ℓ×2000만대×20%=8억ℓ

-“이대로 가면 몇년 뒤 회사문 닫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성과를 잊고 밀폐용기를 차세대 주력으로 개발해야 합니다.”95년 사장이 된 나는 새로운 미래성장 사업 추진에 나섰다. 당시 타파웨어는 한국에서만 연간 10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여닫는 불편함 등 타파웨어의 단점을 극복하면 국내외 시장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경영진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현재 국내 1위를 지키고 있는데 굳이 모험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내 계산은 간단했다.“국내에 보급된 냉장고가 2000만대라고 합니다. 각 냉장고의 평균용량을 200ℓ 정도만 잡아도 무려 40억ℓ에 달합니다. 이를 20%만 차지해도 8억ℓ 시장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1ℓ짜리 밀폐용기의 출고가를 1000원만 잡아보세요.8000억원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신제품의 형태는 ‘4면 결착형’(4개의 뚜껑 잠금장치로 본체를 밀폐하는 방식)으로 했다. 실험결과 타파웨어 같은 ‘실링형’(Sealing•뚜껑과 본체의 마찰력으로 밀폐하는 방식)보다 밀폐력이나 편리성에서 훨씬 나았다. 하지만 문제는 실제 제작이었다. 우리가 참고할 것이라곤 ‘타도대상’인 타파웨어와 러버메이드밖에 없는데.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뚜껑을 물샐 틈 없이 본체와 결착시키려면 4개 잠금장치의 힌지(Hinge•경첩과 같이 꺾이는 부분)가 완벽해야 했지만 힌지 부분을 조금만 두껍게 해도 잠금장치가 꺾이지 않거나 부러졌고, 약간만 얇으면 찢어져 버렸다.

-98년 말,3년간의 고생 끝에 락앤락의 실험제품이 완성됐다. 해답은 0.3㎜의 힌지 두께와 공기의 저항으로 탄성을 유지하는 ‘중공형 실리콘’에 있었다. 타파웨어를 이기기 위해서는 포장도 달라야 했다. 박스 안에 따로따로 담기는 타파웨어와 달리 우리는 마트료슈카(몸통을 열면 겹겹이 같은 인형이 들어 있는 러시아 전통 목각인형)처럼 작은 용기는 큰 용기 안에, 큰 용기는 더 큰 용기 안에 넣을 수 있게 했다. 이는 나중에 해외수출 때 물류비용을 크게 줄이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완벽한 제품이 나오기까지는 98년 실험성공 이후로도 한참이 걸렸다. 락앤락이 2000년에야 시장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다. 현재 락앤락의 힌지는 300만번을 조작해도 찢어지지 않는다(한국화학시험연구원 인증). 더는 시험해 보지 않았다. 가정에서 30년을 써도 힌지 조작이 10만번이 채 안되기 때문에 300만번 이상은 의미가 없다.

●미국에서의 첫 성공, 매진…매진…매진

-2000년 시장에 내놓기는 했지만 할인점 입점은 쉽지 않았다. 잘 팔리는 타파웨어와 러버메이드가 차지하고 있는 진열대를 보도 듣도 못한 국산제품에 선뜻 내주려는 곳은 없었다. 가까스로 입점한 곳이 서울 반포의 킴스클럽 본점. 그러나 대부분 주부들은 잠금장치가 4개인 것을 보고 만져보기조차 꺼렸다. 여닫기가 귀찮을 것이란 선입관이었다. 월 매출목표 3억원은커녕 3000만원어치도 팔리지 않았다.

-그해 4월 홍콩 주방용품 전시회는 락앤락 신화의 출발점이었다. 한 외국 바이어가 우리 제품을 세계 최대 홈쇼핑 방송인 미국 QVC를 통해 팔자며 10만달러의 계약금을 건네왔다. 그러나 그해 8월 바이어는 돌연 계약취소를 알려왔다. 홍콩 전시회에서 락앤락이 인기를 얻은 뒤 30여개 업체가 우리 제품을 베껴 싼값에 내놓는 통에 도저히 가격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미국 방송을 위해 30만달러를 들여 인포머셜(홈쇼핑용 광고방송)까지 찍은 상황에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바이어에게 QVC 방송건만은 예정대로 진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신에 방송으로 생기는 모든 손실은 우리가 물어주기로 했다.‘올인’이었다.2001년 6월 드디어 첫 방송이 나갔다. 대박이었다. 준비한 5000세트가 순식간에 매진됐다. 이 사실이 한국에 전해지자 국내 홈쇼핑사들이 먼저 연락을 해오기 시작했다. 당시 LG홈쇼핑에서는 방송 9회 연속 매진의 대기록이 세워지기도 했다.

-하나코비 마케팅의 힘은 거미줄 같은 영업망에서 나온다. 가능한 한 모든 영업망을 총동원한다. 해외수출은 물론 홈쇼핑, 할인점, 일반총판, 도소매, 인터넷쇼핑몰, 특판사업 등 모든 통로를 활용한다.

특히 각각의 판매비중이 전체매출의 15∼20%씩 분산돼 있어 한 곳이 무너져도 다른 쪽에서 벌충이 가능하다. 극심한 내수침체에 시달려도 올해 매출이 지난해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다. 내수는 줄었지만 수출이 늘었고, 홈쇼핑은 줄었지만 특판이 늘었다. 특히 2만여명에 가까운 주부 서포터스는 우리의 큰 자산이다.

-골프를 한번 배워보고 싶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도.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각 가정의 냉장고 안에 들어찬 락앤락이 아직 우리 목표의 20%에도 못 미치기 때문이다.

2004년 11월 9일
서울신문 / 김태균 기자




[출처] 락앤락 사장|작성자 샹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