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g's Gamification life/손이 가는대로 쓰는 글

[응답하라 그때그시절]사춘기

커뮤니케이셔니스트 2013. 1. 7. 22:28

사춘기라 머라 할것도 없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서 힘든 시기를 겪었고 그럼에도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기에

내 사춘기 시절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교회를 전전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나 또한 계속 교회들을 옮겨야 했고 심지어는 "서울"로 급상경을 하게 되었다.


교회. 어디를 가든지 항상 위원장급(회장)임원으로 섬기게 되었다.
교회에서 목회자 자녀는 모두 신앙이 좋을 꺼라는 기대감을 갖고 바라보게 되며


무슨 일이든 쉽게 받게 된다.

물론 기쁨으로 해야하나 때로는 의무감이 컸다


특별히 목사님 아들이라는 이름에 있어 
나의 행동이 아버지의 이름을 대신함을 알았기에 눈치를 보고 살았음이 더 컸다.
그럼에도 주님은 은혜를 주셨고.. 뒤이어지는 수많은 괴로움을 이겨 나를 지금까지 행복하게 하셨다.


목사님아들로 눈치보고 YES맨이 되었다. 매년 있는 행사(수련회등은 적어도 100여명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준비하는 큰 행사)를 준비하는 임원으로써 성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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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는 16평 아파트에라도 살아봤지만

서울로 이사와서는 우리 아버지가 목사님이 되고 나서도 정말 오래가 지나서야

아파트에 살 수 있었고 이전까지는 모두 반지하 원룸 혹은 투룸에 가족이 함께 살았다.


내가 이사갔던 곳은 은평구 예일여고 사거리(구산역) 근처.

작은 집 세 곳이 한 화장실을 쓰고 용변 이후에는 바가지에 물을 퍼서 이용해야 했다.

이사갔던 바로 겨울. 서울에는 함박눈이 내렸는데..

밖으로 나갈려고 문을 여는데 여간해서 열리지 않았다.

용을 써서 팍 열자마자 내 무릎채까지 싾여있던 눈이 문 안으로 와르르..

(당시 대구에서 눈을 못 보고 살았던 나로써는 컬쳐쇼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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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도 나는 문제를 겪는다.

대구사투리를 쓰는 머리 큰 녀석. "대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는데

이 때 어린 마음에 날 놀리는게 참 싫었다.


그러다 놀리는 소위 '일진'얘한테 화를 내다

되려 내가 심하게 맞고.. 주위의 얘들이 셔틀을 시키는 '시다바리'행세까지 하게 되는데..

솔직히 내가 그 얘들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는 것을 보면 
그 때의 분노(지금은 웃고 넘긴다 생각함에도 불구하고)를 잊지 못해서이기도 할꺼같다


그 때 나를 재밌게 보고 함께 해준 친구 녀석 K(가명.이후에 또 언급)와는 나름 깊은 우정을 갖고
지금도 함께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이것저것 하기 싫은 일을 하며 스스로도 삐뚤어지고 싶었지만
그래도 교회에서 아버지 이름에 피해주지는 말자라는 생각으로 참고 참고 참았다.

불필요하게 장기자랑을 하고 내려오는데..
나름 일진이라고 있는 친구 녀석 하나가 혼자 까부네 하며..욕을 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분노는 생각보다 컸다.
나는 어느날부터 매일 팔굽혀펴기 100개씩을 하고 있었다.
만약 집에 부탁할 형편이 되었다면 체육관이라도 끊어 운동을 배우고 있었으리라.

생각보다 빠르게 서울말을 익혔고 그냥 혼자서 서울말을 따라해보기도 했다
1년이 지날 무렵, 난 확실히 대구 사투리를 까먹어 버리고 서울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나에게 무서운 것은.. 내가 흉기를 들고 등하교를 한 일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상처입었던 자존심이지만 그래도 정말 못 참으면 어떻게 해버리리라 맘먹고 말이다)

지금은 이런 것들이 다 추억이지만 때때로 학교폭력이 뉴스에 나올 때 난 그 때 아무 일도 없이 생활했었음에 안도하고 또한 피해자 가해자 모두를 생각하며 안타까움을 급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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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잠깐의 남녀공학(하지만 찌질한 1년)을 제외하고
남중남고 출신으로 살았다.

고등학교 진학 후 중학교 친구들과는 다 떨어진 새로운 학교에 배정받았고
중학교 같은 반이던 논다고 눈치보던 친구가 왔을 때 오히려 강한 모습을 보였다.

고등학교에서도 자존심에 상처 입은 일들이 많았는데
그당시, 유행하던 교복자율화 정책으로 인해 
교복이 아닌 사복으로 등하교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옷이 별로 없었다... 정말 슬프게도..
그래서 남는 시간에 알바를 하러 여기저기 구하려 다녔다.

그 나이. 그 몸에 할 수 있는 알바는 전단지 알바 정도이다.
장당 10원인지? 50원인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고 다녔고..
뒤이어 당시 유행하던 하나로통신,메가패스,두루넷을 광고하는 노란 광고지를
열심히 붙이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벌은 몇십만원으로 구입한
황토색 떡볶이 코트.

지금 생각하면 그 거.. 왜 샀지? 싶지만..
난 확실히 패션 감각이 친구들에 비해 밀렸던 것같다.

친구들과 함께 석계역 드림랜드에 자주 놀러가곤 했었는데
(그당시의 드림랜드는 없어지고 서울숲으로 바꿨다)
어린이날같은 대목날을 빼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무조건 기다림없이 소위 '자유이용'을 할 수 있었다. 
특별히 우리가 좋아하던 기구는 팡팡 디스코.

팡팡디스코를 통해 자연스럽게 여자얘들과 말을 틀 수 있기 때문이리라.
전직 웨이터도 한 나름 붙임성(?)있는 친구의 활약으로 헌팅을 시도할 수 있었는데..
인기순위조사 꼴찌. 이유는 패션감각 제로.
그 당시 설움은 나로 하여금 값싸면서도 예쁜 옷을 사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켰고
이후 책 욕심으로 바뀌기 전까지 나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많은 옷을 사고 팔았던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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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부터 읽은 책 지식으로 국어와 사회에 있어서는 부담이 없이 성적이 나왔지만
영어와 수학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야자를 했지만 집중력있는 공부를 하지는 않았고 시키니까 자리 지키고 있자라는 생각이 강했다.

부모님도 공부에 대해 심하게 터치하는 분들도 아니셔서 고2때까지는 그냥 적당히만 보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80~90점대의 내신성적을 유지하며 학교를 다녔다

슬슬 주위에서 대학 얘기를 하면서 고2모의고사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고2 마지막 모의고사 점수..거의 전멸.

손놓고 있긴 했지만 문제를 푼다고 풀었다.
그런데.. 이 점수라니..

수학이 8점..

나는 도저히 이런 상태를 냅두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나 "과외"시켜주세요..제발.
친구들한테 물어보다 들은 얘기에 꽂혀 어머니께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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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의 수험생활을 생각할 때 지혜롭게 공부하지는 못한 듯하다.
누구 하나 바른 공부법에 대해 지도해주는 분도 없었고 찾을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그렇듯 나의 수험생활. 어려운 만큼 기억도 많이 남는다